얼마전 왕의 남자의 원작이라는 이(爾)를 보고 왔습니다. 인터넷에 돌고 있는 희곡 이(爾)를 조금 읽고갔기 때문에(작품 전체가 올라오진 않았더라고요) 두 작품이 전혀 같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연극과 영화는 연산조를 배경으로 광대 공길과 장생, 연산과 녹수를 주인물로 등장시킬 뿐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비롯하여 전하려는 주제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다르더라고요.
왕의 남자의 공길이 지극히 수동적이고 순정적인 인물이라면 이(爾)에서의 공길은 지극히 권력지향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입니다. 연극의 전반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연산이 공길의 벗은 등을 내려치는 장면은 둘 사이의 합의에 의한 SM플레이를 연상시키지만 내가 그만하게 해달라고, 아프다고 말해달라는 연산과 연산의 가학을 권력의 성취를 위한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는 공길의 마음에 사랑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공길은 연산에 아첨하고 교태를 부리고 연산의 슬픔을 이용합니다.
슬픔처럼 잡스러운 것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서러움에 힘겨워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있다는 사실에 슬퍼 견딜 수 없는 인간 연산의 마음을 어루만지려 했던 사람은 오히려 공길보다는 녹수입니다. 그녀는 작품의 전반부, 연산의 슬픔을 '해도 아기는 태어나고, 무덤에도 꽃은 피고. 그래, 우리 아가 이제 그만하자.'라며 위로하죠. 물론 그녀 역시 현실에 바탕한 권력적 인간이기에 공길과의 권력싸움에서도 패하고 결국 믿었던 자에게 죽임당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게되지만요.
이(爾)는 주인물들에게 냉정하고 잔혹한 연극이었습니다. 가장 건강한 캐릭터를 가진 것은 장생이었지만 슬프게도 조선최고의 우인. 제 가슴이 벌렁거릴 때 진실로 살아있음을 느낀 진정한 광대, 장생의 캐릭터는 제 몰입을 이끌어내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연극 속 출연분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사람을 웃기는 광대가 칼을 차고 반군이 되는 설정에 공감할수가 없었어요. 광대에게는 광대의 방식이 있는거에요. 말과 재주로 왕을 욕하고 왕을 조롱하고 더불어 세상과 함께 웃는 것이 광대가 사는 길이고 광대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때문에 제게 장생의 죽음은 공길의 자아를 깨어나게 하는 것에 족해보였습니다.
장생의 죽음으로 공길은 그간의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깨어납니다. 그는 용포입은 똥깨와 똥깨에 빌붙어 권력을 탐하고 종4품 벼슬에 매어 자신을 동시에 조롱합니다. 아마도 공길은 장생처럼 죽을 수 있길 바랬겠죠.
그러나 연산은 공길을 죽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길에게 공신이 되어 명을 이어 계속 놀아야 할 것이 아니냐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죠. 그간 자기가 진정으로 바랬던 것은 욕이 아니라 죽음이었노라고 말하면서요. 어쩌면 연산은 공길을 따라 한 한판의 장님놀이를 통해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인생은 나 여기있고, 너 거기 있는 상태에서 서로를 바라고 탐하며 합해지길 원하며 서성거리고 실패하다 나 여기있고, 너 여기있으며 짧은 즐거움을 맛보다 그것도 헛되이 진실로 인간이 바라는 것은 나도, 너도 여기없는 상태라는 것을요. 인간의 삶이란 그거 장님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이(爾)는 어쩌면 비극적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연극이었지만 보는 동안 괴롭거나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왕과 중신과 공길까지도 조롱하는 우인들의 신나는 한판 놀이가 볼만했고, 적극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공길과 녹수사이의 권력다툼도 재미있었습니다. 연산의 광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점은 약간 아쉬웠지만 이미 각종 영화와 글들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인물이기에 그랬겠죠. 더불어 리듬감있고 맛깔나는 대사들도 좋았습니다. 그 중 가장 즐거웠던 건 아무래도 우인들의 놀이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적절히 뒤섞어 연극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관객을 연극에 웃으며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으니까요. 벽사놀이를 위해 몸좋은 남자배우들이 출연한 덕분에 우인들이 등장할 때마다 한복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몸매를 감상하는 것도 꽤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하하;;
연극의 인기가 좋아 지방공연도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부러 이걸보러 서울까지 온 제 친구가 꽤 아쉬워하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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