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새우고 부천으로 달려갔습니다. 영화보다가 자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평소에 많이 자두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는 괜찮더군요. 그러나 뇌가 거의 빈사상태라 옆에 있는 사람이 고생 좀 했을거에요. 폰을 잃어버린 주제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느긋하게 사진을 찍고 있고, (네...이미 개념이란 저 멀리 달아난 상태였지요.) 기껏 여기저기 연락해서 폰을 찾아줬어니 "에이. 이건 문자도 안보내지는 옛 폰을 정리하고 새 폰을 사라는 신의 계시였는데..."따위의 말이나 하고, 하루종일 배고프다고 칭얼대고, 새로 산 구두가 아프다고 칭얼대고, 술 마실 때는 눈에 다크서클을 깊게 깊게 달고 이히히~거려 '도저히 안되겠다.'따위의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잘 감상했어요.

처음 본 건 판타스틱 단편 걸작선[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녀의 핵주먹, 피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 제거작전, 수업, Mirph, 내 마음속에, 칼리토폴리스의 7작품을 봤는데 가장 짧은 칼리토폴리스가 제일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일 기대했던 피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는 제 수준으로는 혼란에 혼동 뿐이어서 당최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아동성추행의 문제를 다루었던 수업도 그저 그런 정도였고 (선생님이 예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진 않았지만 짧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몇 편의 영화를 남기지는 못한 것 같네요.

간단하게 핫도그로 요기를 하고 복사골 문화센터로 달려갔습니다. 부천영화제는 셔틀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진행요원 분들도 다들 친절하기고 말이죠.

리커[프로그램]는 X등급의 호러 영화여서 못보면 어쩌나, 라고 걱정했는데 담요속으로 숨으려는 저를 늑대양이 "돈내고 본 거니까 끝까지 봐!"라며 옆에서 괴롭혀줘서 제대로 볼 수 있었어요. 고맙다고 해야 하는건지...그래도 크래딧이 끝까지 올라가고 나서 "아, 정말 재미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감독과의 대화시간도 즐거웠어요. 영화의 여주인공이자 아내인 티나 일만과 함께 나왔는데도 굉장히 솔직하더군요. 크래딧 마지막에 "독립영화에 투자 좀 많이해줘요"라고 쓴 감독답게 말이죠. 영화에서 날카로운 음향효과를 낸 이유에 대해 물으니 '관객들을 무섭게 하려고'라고 대답하고, 영화의 음악을 직접 담당하셨던데 평소에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으니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돈이 없어서 직접 해야했다.'고 대답해 줄 정도로 솔직했어요. 그러나 돈때문에 고생하고 만든 영화치고는 특수효과도, 액션도 좋았어요. 오늘 본 영화중에서는 제일 만족스러웠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우리들'이 열광해 마지 않은 영화 일레븐 맨 아웃[프로그램]은 월드컵 때 못태운 동인혼을 불사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으나, 축구라는 에로틱한 소재를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오히려 게이 아버지와 알콜중독자 어머니를 둔 청소년이 어떻게 부모와 화해하느냐의 과정에 가까웠죠. 커밍아웃을 한 최고팀의 스트라이커가 게이축구단으로 들어가게 만들었으면 세레모니 장면에서 므흣한 감정을 느끼거나 시합이 끝난 뒤 라커룸에서 섹스하는 장면같은 좋은 연출을 얼마든지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샤워실의 장면을 적나라하게 촬영하고도 하나도 야하지 않은 저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이로서 남자목욕탕에가도 저는 별 감흥이 없을거라는 사실 하나만 확인했달까요. 군데군데 코믹한 요소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늑대양과 함께 낸 결론은 '자기애가 너무 강한 부모를 만나면 애가 고생한다'였습니다. 전남편과의 섹스장면을 사진으로 현상해 방에 걸어놓는, 집에서도 옷은 걸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개념이 없는 엄마와 자신의 상반신 누드 사진을 한쪽 벽면이 가득차도록 걸어놓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언제나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법이에요. 그리고 세계 어디를 가도 물랑루즈는 게이사이에서 인기가 높군요.

이제 다시 저는 부천으로 달려가야겠어요. 비가 많이 온다는데 춥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open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