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게 이 영화는 남자들과 함께 보게 되었네요. 브로크백 마운틴도 그렇고 작년부터 퀴어영화는 남자들과  함께 보게되요. 왕의 남자도 그렇고 라디오스타도 그렇고;;) 저는 제 주위의 남자들에게 제가 퀴어코드를 즐긴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함께 퀴어영화를 본다거나 할 때는 "이 남자들이 역겨워하거나 꺼려하면 어쩌나..."하는 우려를 하거든요. 더군다나 후회하지 않아는 본격적인 남성간의 성행위 장면이 나오는 영화니까요. 그런데 괜한 우려였어요.

같이 본 남자아이들은 이 영화를 '굉장히 슬프다','몇 해 만에 이렇게 가슴 갑갑해지는 영화는 처음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 영화가 가지는 사실성 때문인 것 같아요. 얼마전 한 친구를 만났을 때 이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거 게이 신데렐라물이라며?"라고 물어보던데, 아니요. 이 영화는 신데렐라물이 아니에요. 신데렐라에는 계급적 갈등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아요. 비록 새엄마와 새언니들에게 구박을 들으며 다락방에서 살긴했어도 신데렐라는 귀족의 신분이었어요. 왕실파티에 초대장이 날아올 정도의 이름있는 가문이었죠. 아버지는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집안의 하녀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참한 얼굴에 살림잘하는 신데렐라는 굳이 왕자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나이가 차면 행복해졌을거에요. 가문 이름만 가지고도 부유한 상인과의 결혼이 어렵지 않을 정도였고, 왕자와 결혼할 때 대신들과 왕과 왕비내외의 반대를 받지 않으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조건이 갖춰진 여자였으니까요.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의 수민과 재민 사이의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아요.

섹슈얼리티를 모를만큼 무식하진 않으니 니가 남자와 자든말든 상관없지만 결혼은 해야 한다는 엄마를 가진 수민과 당신은 부자라서 도망갈 곳이 있지만 나는 아무것도 없으니 공짜로 줄 수 있는 건 짧은 입맞춤밖에 없었던 소년간의 사랑은 얼핏 갑갑하고 절망적이기만 해요. 호스트바에 들어간 것을 성토하는 고아원 형에게 "나 독해, 이미 충분히 독해. 돈 많이 벌어서 대학도 갈거야. 그래서 그 잘난 놈처럼 될거야."라고 말하는 수민의 문제는 수민이 호스트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 대학에 간다고 해도 결코 그 잘난놈처럼은 될 수 없다는데 있어요. 잘난놈은 태어날 때부터 잘난놈이었으니까요. 재민의 위치도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왕자가 아무리 신데렐라를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왕위를 버릴 정도로 사랑했을까요? 아니, 사랑에 눈이 멀어 왕위를 버린 왕자는 뭘 할 수 있었을까요? 도망갈 곳이 없기는 부자인 재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재민이 왕이었다면 괜찮았을 거에요. 문제가 있다면 재민은 왕자였죠. 실질적인 권력과 부보다는 권력의 가능성과 부의 찌꺼기만 있는...그러나 재민은 어느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낮에는 공장에서, 그 뒤에는 컴퓨터 학원에서 캐드를 배우고, 짬짬이 대리운전으로 손님들의 토사물을 치우며 사는 고아원출신 소년과 눈에서 퐁퐁이 나오는지 안나오는지 알바 아니지만 기름때 조금이라도 묻은 접시에서는 음식먹고싶지 않은 친구들이 있을 법한 청년의 사랑은 자기와 타인을  파괴시킵니다.  

어떻게 보면 신파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단지 달짝지근한 야오이 신파를 생각하며 극장을 찾았고, 이송희일 감독의 취향도 관객잡아 흔드는 신파가 좋다고 밝혔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그러나 예송논쟁시의 치열했던 당파대립속에서도 '꽃이 부끄러워하니 그와 더불어 다투지말아야 할 아름다운 그대'를 한 여름 꿈보다 더 뜨겁고 농밀하게 사랑하는 순간을 그린 순흔보다 후회하지않아의 갈등은 더욱 깊고 치열해졌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아니에요. 어쨌든 제목에도 나왔다시피 후회하지 않는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이니까요. 우리의 신데렐라는 충분히 독하고, 우리의 왕자는 왕위에 안주해 사랑을 모른 척 할정도로 약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비극의 이유였지만, 닥쳐온 비극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죠.

덧. 영화를 보고나서 이영훈의 무대인사가 있다길래 한번 더 보러갔었습니다. 귀엽게 쳐진눈과 목덜미가 깨끗하게 내려오는 이영훈은 괜찮은 배우였어요. 군대 간 아는 동생 면회왔다는, 편해보이는 옷차림도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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